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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1. 31. (금) 오후 7시 50분 영화의전당 인디플러스
부산로컬시네마데이 Busan Local Cinema Day

로컬 픽, 시간과 빛 Local Pick, Bright Time

진행 | 김지연(영화평론가, 인디크리틱 편집장)
유상곤 특별전: 일상의 온도

익숙한 일들과 익숙해져야 하는 일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자신을 지탱하는 것이 삶이라면. 방황, 고민, 슬픔, 아픔, 고독... 그것이 무엇이든 담담하게 나의 몫으로 껴안고 견뎌내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루, 또 하루를 감당하는 일이라면. 고단하고 외롭고 단순한 일상 어딘가에서 가느단 긍정을 놓지 않고, 어딘가에서는 한계를 인정하며, 내일을 반복할 용기를 내보는 것이라면. 그 종류와 형태와 비율은 각자에게 다를지라도 누군가의 그 마음이 가만히 헤아려지는 순간이 있다면. 삶의 보편을 조금 더 이해하며 이 삶을 살게 된다면. (부산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 김지연)

표류 The Drift

극영화┃컬러┃DCP | 9분 | 1996┃대한민국

시놉시스   한 남자가 망망대해의 위태로운 뗏목 위에 표류하고 있다. 그런 그의 곁을 또 다른 표류자와 기관배가 스쳐가 버리고, 그는 서서히 반복되는 절망에 익숙해진다. 막상 그의 곁으로 빈사상태의 늙은이가 떠내려오자 외면한 채 자신의 뗏목으로부터 슬그머니 밀어내고 그는 또다시 홀로 표류한다.

프로그램노트   <표류>는 명료한 은유의 영화다. 이후에도 유상곤이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고독, 유폐, 단절의 형상을 한 인간관계의 원형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현재의 관객으로 접할 수 있는 그의 시작이자 1990년대 부산독립영화를 주목하게 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망망대해 위로 쏟아지는 직사광선을 피할 도리도 없고 돛도 닻도 없이 가랑잎처럼 떠 있는 뗏목이란 얼마나 연약하고 불안한 존재인가. 단출한 구성만으로도 우리 삶의 일부를 탁월하게 그려내는 그의 미덕은 시간 앞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김지연)

길목 Way Entrance

극영화┃컬러┃DCP | 18분 | 1997┃대한민국

시놉시스   한적한 어촌의 겨울밤, 철길 건널목 허름한 가게 앞에서 젊은 여자가 신호음만 들려오는 수화기를 들고 있다. 그녀가 가자 가게 안의 늙은 여자가 나와 전화를 떼 내어 들어간다. 가게의 불이 꺼진다. 가게 주위에서 일어나는 늙은 여자의 일상. 한복집 재봉틀 앞에서 일하는 젊은 여자의 일상. 퇴근길 젊은 여자는 가게 앞을 지나가다 전화를 건다. 여전히 신호음만 들려 온다. 밤늦은 기차가 지나가고 가게를 나온 늙은 여자가 전화를 떼 내어 가게로 들어간다. 가게 불이 꺼진다.

프로그램노트   유상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일상을 스크린에 옮겨온다. 거기엔 삶의 골수로부터 채취한 농밀한 감정이 배어 나와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말 없고 무표정한 인물들은 오늘도 우리가 거리에서 스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처럼 평범하다. 두 인물의 단조로운 삶은 철길 앞 슈퍼마켓에서 교차한다. 겨울, 사위는 이미 어둡고 슈퍼마켓의 작은 불빛마저 꺼진 뒤 완전히 어둠에 잠기는 세상을 목격할 때, 그 순간 가슴속에 밀려드는 감정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고독, 스산함, 외로움, 슬픔, 아픔. 그런데도 기다리거나 견뎌내는 마음의 담담함, 그리고 어느 정도의 체념에 관하여. (김지연)

체온 The Body Temperature

극영화┃컬러┃DCP | 8분┃1998┃대한민국

시놉시스   노인은 정신나간 딸을 오토바이에 태운 채 한적한 길을 달린다. 갑작스레 소낙비가 내리고 그들은 운동장 옆 처마에서 비를 피한다. 노인은 딸의 젖은 머리를 닦고, 물을 먹여주고는 돌아서서 비 오는 운동장을 바라보며 깊은 회한에 젖는다.

프로그램노트   이미지도 말을 한다. 유상곤은 그걸 안다. 군더더기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간결한 형식 안에는 삶의 보편성이 높은 밀도로 응결돼 있다. 다시 말해 관객은 이들 부녀가 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삶이 녹록하지 않을 것을 안다. 우리는 노인이 헬멧을 쓰지 않은 이유를 알 순 없어도 그가 딸을 지극하게 돌본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다. 건조한 관조자의 시선으로 생의 고단함, 슬픔, 연민을 응시하는 영화 앞에서 감정의 파고에 휩싸이는 건 관객이 된다는 말이다. (김지연)

이른 여름, 슈퍼맨

Superman in Early Summer

극영화┃컬러┃DCP | 14분┃2001┃대한민국

시놉시스   이른 여름 아침,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던 소녀는 밀짚모자를 쓴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는 것을 눈여겨 본다. 버스 안의 승객들이 모두 잠이 든 순간, 소녀는 예의 그 아저씨가 하늘을 나는 슈퍼맨이 되어 나타나는 환상을 경험한다.

프로그램노트   <이른 여름, 슈퍼맨>이 예쁜 동화가 되려고 시도한다는 데엔 동의할 것이다. 동그란 눈을 한 어린이 주인공을 귀여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고, 아빠에게 가는 버스에서 슈퍼맨을 만난다는 영화의 발상은 천진하다. 무성영화 시대의 슬랩스틱이 소환되고 아기자기한 판타지 장면들이 펼쳐진다. 그렇게 영화는 그늘 한 점 없이 밝다. 순간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런 것들이 위로가 되는 때가 있다. (김지연)

상영 후 토크┃김지연

(유상곤 감독님은) 일상에 그냥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소재들을 다루시면서 그 안에서 어떤 실존적인 인간의 불안이라든지 고독이라든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고통, 불안, 이런 어려움을 감지할 수 있는 작업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각자에게 삶의 시간은 모두 다르지만 관객에게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제공합니다.


이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 그 아버지가 딸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제시되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미지들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이미지를 계속 우리에게 던져주며 그런 것들을 짐작하게 만드는 경험을 하는 거죠. (……) 으례 하는 의미없는 행동들이 영화 안에서 의미가 되도록 배치하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 시선들의 주체도 저는 유상곤 감독님의 것 같거든요. 좀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영화의 시선은 되게 건조해 보이지만, 인물들을 끈질기게 관찰하는 세상 그 어딘가의 위치, 유상곤 감독님의 마음 내지는 카메라가 머무른 그 자리가 감독님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갖고 있는 애정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 같습니다.